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고여 피살 사건 (문단 편집) === [[대요수국의 난]] === [[고려]]와 [[몽골 제국]]이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것은 [[1219년]]에 있었던 '''[[강동성 전투]]'''때였다. 당시 만주 지역의 정세는 굉장히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여진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가 말기에 접어들어 나라가 막장이 되어 [[거란족]]과 [[몽골족]] 등 주변 민족들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몽골족은 [[1206년]]에 태조 [[칭기즈 칸]]이 몽골 내 소부족들을 규합하여 몽골 제국을 세웠다. 그리고 거란족들도 슬금슬금 독립할 준비를 했다. 그때 거란족의 '''야율유가'''(耶律留哥)란 인물이 몽골의 지원을 받아 금나라에서 독립하여 대요국(大遼國)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동요(국가)|동요]]'''(東遼)라고 한다. 이때 금나라는 요동선무사 '''[[포선만노]]'''(蒲鮮萬奴)에게 무려 대군 400,000명을 주어 야율유가의 동요 군대를 토벌하도록 했으나 포선만노의 군대는 처참하게 박살이 났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요령성의 요양에서 동진(東眞)→'''[[동하]]'''(東夏)라는 새 나라를 세우고 독립해버렸다. 그런데 거란족은 독립한 건 좋았으나 곧바로 내분에 휩싸였다. 몽골의 지원을 받아 독립한만큼 동요의 야율유가는 철저하게 [[몽골 제국]]의 [[제후국]] 노릇을 했으나 일부에서 >"몽골의 지배를 받는 거나, 금나라의 지배를 받는 거나 뭐가 다르냐?" 며 반기를 들고, 거란족만의 독자 노선을 걷는 새 나라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야율유가의 동생인 '''야율시불'''(耶律厮不)이었다. 그는 형인 야율유가를 축출하고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이를 '''[[후요]]'''(後遼)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야율시불은 몽골에서 보낸 [[다루가치]] 300명도 몰살해버리는 간이 부은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렇게 천지분간 못하고 까불던 야율시불은 나라를 세운지 꼴랑 70일 만에 암살당했다. 야율시불이 암살당한 후 몽골은 축출당했던 야율유가를 파견하여 대대적으로 반몽 강경파인 후요 토벌에 돌입했고, 이제 후요에 남은 선택지는 항복 또는 버티기밖에 없었다. 야율시불의 아들인 '''야율금산'''(耶律金山)과 '''야율금시'''(耶律金始)[* 《고려사》에는 금산 왕자와 금시 왕자로 기록되었다.]는 몽골과 금나라에 비해 비교적 허약한 고려로 들어가 거점을 마련해 부족한 물자를 충당하고, 장기간 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정해 승상 야율걸노(耶律乞奴)를 필두로 해서 고려로 쳐들어갔다.[* 내분이 어지간히 심했는지 야율걸노는 후에 야율금산에게 암살당했다.] 이것이 [[1216년]] 8월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때 고려는 거란 유민 세력의 이 공격을 상시적인 국소 분쟁으로 간과했다, 실권자였던 '''[[최충헌]]'''은 이 방심으로 인해 [[골든 타임|초동 대응]]에 실패했다. 평상시의 국지전이었다면 이런 지원 요청이 오지도 않았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국경에서 구원을 청하러 온 전령을 귀양보내는 황당한 짓을 저질렀고, 1개월 뒤인 9월에 1차 저지에 성공했지만 고려에 침범코자 한 거란 세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같은 해(1216) 12월에 거란족 전체 전력이 드디어 고려 국경을 넘어와 수도인 개경 인근에 출몰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면전으로 비화되고 나서도 최충헌은 핵심 전력을 내부 단속에 우선시해 투입하지 않았다. 고려 내부에선 천민 계급이었던 '[[백정|양수척]]'들이 거란족의 길잡이 노릇을 하며 내통[* 이 역시 최충헌의 애첩이었던 [[자운선]]의 행포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자운선과 순천사 주지의 횡포 때문에 자신들이 거란의 편에 붙었다며, 이들을 죽이면 다시 고려 편에 서겠다는 익명의 글이 붙기도 했고, 그때문인지 어쨌는지 이후 순천사 주지는 도망가고, 최충헌은 자신의 애첩 자운선과 상림홍 등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했고, 근거지를 상실해 고립무원이었던 거란 세력은 배수진을 친 채 도주와 반격을 반복하며 고려 영내에서 후퇴하지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 전열을 재정비한 [[우봉 최씨]] 무신정권은 즉시 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김취려]]'''를 중심으로 해서 반격에 돌입, 7번의 전투에서 대승하고, [[1217년]] 7월 간신히 거란군을 국경 밖으로 격퇴시켰다, 보통 연패를 겪은 군대는 후퇴하기 마련이나 전술했듯이 이 거란 잔당은 이미 돌아갈 곳이 없었다. 바로 3개월 뒤인 10월, 갈라현 여진 세력을 지원군으로 삼은 거란 유민은 고려 영내를 재침범했다. [[1218년]] 4월에 이르러 최씨 무신정권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각 도의 안찰사들에게 동시 경계 태세를 조율케하고, 거란 세력이 주력군의 공격을 회피해 타 지역으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했다. 결국 [[1218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고려군은 동북면으로 침범한 거란족을 서쪽으로 퇴각시켜 강동성으로 몰아넣고,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때와 동시에 몽골 제국이 남진하기 시작했다. 몽골의 '''[[칭기즈 칸]]'''은 장군 '''[[카치운]]'''(哈眞, 합진)[* 칭기즈 칸의 동생 카치운과는 동명이인이다.]에게 10,000명의 군사를 주어 [[후요]]의 유민들을 토벌하도록 했고, 몽골의 위성국가였던 [[동하]]에게도 명령하여 '''완안자연'''(完顔子淵)이 지휘하는 20,000명의 군사가 몽골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강동성에서 거란 유민과 고려군 사이에 대치 상태가 전개되고 있었으나, 몽골과 연합한 동하는 [[도방]]과 고려 무신정권에 일방적인 통보를 날리고 참전했다. 고려 조정은 이들 연합군의 막강함을 알고, 강동성의 '''[[조충(고려)|조충]]'''과 [[김취려]]의 주력군에게 확전을 주의하며, 연합군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라고 황급히 지시했는데 몽골군은 거란 유민의 침입 경로를 그대로 답습해 영내로 침입했다. 그해 12월 [[강동성 전투]]가 시작되었고, [[1219년]] 1월에 거란 잔당이 완전히 소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